
에베소서 3장 14~21절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주일 예배가 끝난 교회 마당에서 중학생 하준이가 할머니의 가방을 들어 드리며 불쑥 물었습니다. "할머니,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계신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아무 느낌이 없어요. 진짜 계시긴 해요?" 할머니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계시겠지. 믿으면 계신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말끝이 이상하게 흐려졌습니다. 사십 년 넘게 교회를 다녔지만 속으로는 늘 "계실걸?" 하고 짐작해 왔을 뿐, 한 번도 확실하게 만나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상한 기도를 합니다. 에베소서 3장에서 그는 이미 믿는 사람들을 위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라고 빕니다. 이미 계신 분을 계시게 해 달라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요한복음 14장 20절에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계시냐 안 계시냐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 사실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실감하지 못하며, 솔직히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집 안에 귀한 보물을 두고도 그것을 모른 채 평생 가난하게 사는 사람과 같습니다. 소망도 힘도 없이 엉터리처럼 살게 되는 까닭입니다.
소망이 없으면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아 노벨 평화상을 받은 엘리 위젤은 『밤』에서 수용소로 끌려가던 기차 안의 모습을 증언했습니다. 곧 죽는다는 두려움 속에서 사람들은 소망과 함께 부끄러움까지 잃어 갔다고 합니다. 소망이 사라진 자리에는 수치심도 남지 않습니다. 세상이 점점 거칠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 모릅니다.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성도라면서 죽음 앞에서는 여전히 떨고, 하늘나라 이야기가 나오면 시큰둥합니다. 에드워즈나 허드슨 테일러 같은 믿음의 선배들은 천국을 그토록 사모했는데, 우리는 하나님이 "얘야, 이제 올라오너라" 하시면 기쁘게 달려가겠다고 선뜻 답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천국은 도대체 어떤 곳입니까? 보석으로 지은 집에서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며 영원히 사는 곳입니까?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상상합니다. 이민을 가면 제일 먼저 집부터 사는 우리 마음이 천국마저 '넓고 좋은 땅'으로 그리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시대 히브리 사람들은 '나라'라는 말을 들으면 땅이 아니라 누가 다스리느냐를 먼저 떠올렸습니다.
예수님의 비유가 그 증거입니다. 누가복음 19장 12절에 보면, 한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떠납니다. 당시 로마는 식민지에 현지인을 분봉 왕으로 세웠는데, 헤롯처럼 이미 땅과 백성이 있어도 로마 원로원에서 통치권을 받아 와야 왕 노릇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왕위'를 가리키는 말이 바로 '나라'(바실레이아)입니다. 학교로 치면 건물과 학생이 다 있어도 담임 선생님의 다스림이 없으면 교실이 아니라 그저 시끄러운 방일 뿐인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의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도 이제 선명해집니다. 먹고 입을 것을 걱정하기 전에, 내 삶이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들어가기를 먼저 구하라는 뜻입니다. 그 통치를 가지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래도록 '주의 날'을 기다렸고, 그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온다고 믿었습니다. 엘리야는 "털이 많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띤" 사람이었습니다. 병든 아하시야 왕이 바알의 신에게 사람을 보내려 하자 길을 막아선 바로 그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광야에 약대 털옷에 가죽 띠를 두른 사람이 나타나 회개를 외쳤습니다.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곧이어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셨습니다. 여기서 '가까이 왔다'는 이미 곁에 와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다" 하시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다가 나타난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나라가 곧 자기 자신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는 '희년'이 보여 줍니다.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읽으신 "주의 은혜의 해"가 바로 희년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땅이 하나님 것이어서, 가난해서 땅을 판 사람도 형편이 나아지면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혼자 힘으로 안 되면 가까운 친족이 대신 값을 치르고 물러 주었습니다. 룻기의 보아스가 그렇게 했고, 그 후손으로 다윗과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갚을 길이 없을 때에는 오십 년째 되는 해에 하나님이 모든 빚을 없애 주셨습니다.
빚에 쫓겨 집을 잃은 한 가족이 길가에 앉아 있습니다. 그때 누군가 와서 "다 갚았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세요" 하고 말합니다. 그 가족이 느끼는 감정이 안식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는 죄의 빚을 갚을 수 없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그 빚을 다 치러 주셨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탕감받은 백성이 자유와 기쁨 속에서 왕의 다스림에 기꺼이 순종하는 곳입니다. 안식은 아무 일도 안 하고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온전히 이루어진 자리에서 해방과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날을 주일로 지키며 모여 예배하는 것도 이 재창조를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계신 곳이 곧 천국입니다. 찬송가 495장의 고백처럼 초막이든 궁궐이든 주님을 모신 곳이 하늘나라입니다. 빌립보서 1장 23절에서 선배들이 어서 그분 곁에 가고 싶어 했던 이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별로 가고 싶지 않을까요? 그분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대형 마트의 시식 코너에서 작은 조각을 맛보고 "맛있네" 해야 한 상자를 사 갑니다. 사람은 먹어 본 것 중에 가장 맛있는 것을 그리워하지, 소문으로만 들은 곰 발바닥 요리를 사무치게 그리워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도 천국을 조금씩 맛보고 있어야 합니다. 맛본 적이 없으니 그립지도 않은 것입니다. 어느 목사가 중국에서 중학생들에게 예수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학교에서 배웠다며 "인간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 정도는 교과서에도 나옵니다. 성도라면 그보다 훨씬 깊이 그분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분을 아는 만큼 우리는 달라집니다. 내일 새집으로 이사하는 가족은 낡은 집의 얼룩과 흠집에 크게 연연하지 않습니다. 곧 누릴 집이 있으니 오늘의 불편쯤은 견딜 만합니다. 바울도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귀해서 다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분을 알 수 있을까요? 길은 성령이십니다. 그런데 성령은 우리가 "주의 영광을 바라볼 때" 일하십니다. 그 영광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믿음으로 봅니다. 순서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성령으로 되고,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일하시며, 그 영광은 말씀을 통해 보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눈물로 기도하고 신비한 체험을 하고 교회 일을 열심히 해도, 말씀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면 그분을 깊이 알 수 없습니다.
돌아보면 우리는 하루에 영상은 몇 편씩 보면서 성경은 한 장도 펴지 않습니다. 한 조사에서는 스스로 '거듭났다'고 답한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일주일에 성경을 한 번도 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영생의 길이 그려진 지도를 서랍에 넣어 두고 길을 잃었다고 한탄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은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신약은 그 완성된 모습을 보여 주고, 성경 전체는 오직 한 분을 가리킵니다.
그날 밤 할머니는 오랜만에 성경을 펼쳤습니다. 에베소서 3장이었습니다. 수없이 읽은 구절인데 이번에는 "계시게 하옵시고"라는 대목에서 눈이 오래 머물렀습니다. "계실걸"이 "계시는구나"로 바뀌는 데는 큰 사건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말씀 한 장을 펴고 그분의 얼굴을 찾아보려는 작은 시작이면 충분했습니다. 이튿날 하준이가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할머니, 어제 그 얘기요, 저도 오늘부터 성경 한 장씩 읽어 보려고요." 할머니는 수화기를 든 채 웃었습니다. 그 말이 어디서 왔는지, 누가 그 마음에 그렇게 일하셨는지 이제는 짐작이 아니라 확신으로 알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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