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베소서 3장 14~21절
로마의 감옥은 어두웠습니다. 바울은 쇠사슬에 손발이 묶인 채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습니다. 죽을 날이 2~3년밖에 남지 않은 늙은 몸이었습니다. 그를 두들겨 패고, 감옥에 넣고, 모함하고, 욕하던 사탄의 세력이 마침내 이 노사도의 손발을 꽁꽁 묶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설교할 수도, 가르칠 수도, 전도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아무도 묶을 수 없는 무기가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바울은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는 감옥, 쇠사슬 소리만 나는 그 자리에서 노인은 어렵게 무릎을 꿇고 아버지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러하므로 내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유대인들에게 기도의 자세는 세 가지였습니다. 일상의 기도는 서서 드렸고, 죄를 자복할 때는 엎드렸으며, 간절한 기도는 무릎을 꿇고 드렸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형식주의가 싫다며 이 형식까지 다 내다버렸습니다. 목욕물을 버리다 아기까지 버린 셈입니다.
형식은 상대에 대한 예의의 외적 표현입니다. 청교도들은 교회까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데도 가장 좋은 옷을 골라 다려 입고 주일 예배에 갔습니다. 형식에 빠져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는 도저히 그분 앞에 갈 수 없어 빌려서라도 좋은 옷을 입었습니다. 렌스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몸의 자세는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태도를 반영한다." 물론 몸은 꿇었어도 마음은 뻣뻣하게 서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무릎이 꿇어진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건방지고 뻔뻔하게 서지 못합니다. 담대함은 뻔뻔함이 아니고, 당당함은 건방짐이 아닙니다. 감옥의 바울은 경건과 두려움으로 무릎을 꿇었고, 동시에 당당했습니다.
바울의 기도에는 "할 수 있으시다면"도, "당신의 뜻이라면"도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실 것을 알고 기도했습니다. 주님은 내 이름으로 구하면 시행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기도하지 못할까요? 무엇을 구하라고 하셨는지도 모른 채 엉뚱한 것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알았습니다.
그의 기도는 또 한 가지가 달랐습니다. 14~15절의 '각 족속'은 헬라어로 '파사 파트리아', 곧 '모든 가족'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천국 가족, 유대인과 이방인, 부자와 가난한 자,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노인,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모두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대개 '나'에서 시작해 '우리 가족'에서 끝납니다. 얼굴도 모르는 성도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면, 그것이 영적 교제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기도의 내용입니다. 쇠사슬에 묶인 사람이 "이 감옥에서 속히 나가게 해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병을 고쳐 달라고도, 세상의 좋은 것을 주시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기도에는 물질적인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가 구한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속사람이 성령으로 능력 있게 강건해지기를,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영구히 거하시기를(카토이케오), 사랑 안에 뿌리박고 터가 굳어지기를, 그리스도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닫기를,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해지기를 말입니다.
그 사랑의 깊이를 이야기할 때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스페인 종교재판소의 지하 감옥을 부수고 들어갔을 때, 착고와 쇠사슬에 묶인 채 썩어 있는 시체들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 작고 음침한 방의 벽에는 십자가가 하나 그려져 있었습니다. 십자가 위에는 '높이', 아래에는 '깊이', 왼편에는 '넓이', 오른편에는 '길이'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을 낙심시킬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크기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남기고 싶어 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구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모든 성도와 함께"라고 덧붙였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서로 다른 경험과 배경이 합쳐져야 그 사랑의 규모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교회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강건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크라타이오오'인데, 바로 앞 13절의 '낙심'(엥카케오)의 반대말입니다. 환난 앞에서 낙심하지 않게 하는 힘입니다. 흔히 속사람은 영혼이고 겉사람은 육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몸은 저급하고 영은 고귀하다는 플라톤적 이원론입니다. 그 사상은 고린도 교회를 흔들었고, 몸은 시궁창에 굴려도 영만 거룩하면 된다는 삶을 낳았습니다. 속사람은 영혼과 육신을 모두 포함한 거듭난 전인, 곧 '네페쉬'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본질적인 인간입니다. 겉사람은 거듭난 사람 안에도 남아 있는, 하나님 없이 살도록 길들여진 또 다른 성향입니다. 우리는 마징가 Z의 아수라 백작처럼 둘을 한 몸에 지니고 삽니다. 그래서 속사람이 강건해져야 겉사람이 후패합니다(고후 4:16).
이 기도가 어디에 놓였는지가 중요합니다. 2장 끝에서 "너희는 이미 이런 존재다"라고 선언한 뒤에 곧바로 이어지는 기도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가야 할 길이 있다는 뜻입니다. 에베소서의 앞 3장은 교리이고 뒤 3장은 실천입니다. 4장 1절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이 3장 끝에 멈춰 섭니다. 홍해를 건넌 감격에만 머물며 구원이 이미 완성되었으니 막 살아도 된다고 하는 고린도 교회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난 더 이상 놀랄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은 딱 내 수준이구나" 하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르러야 할 곳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해지는 자리입니다(엡 3:19, 4:13).
성경은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눕니다. 거듭나 성령의 이끄심대로 살려는 '프뉴마티코스', 전혀 거듭나지 못한 '프쉬키코스', 그리고 거듭났으나 젖을 먹는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는 '사르키코스'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사르키코스로 분류해 젖만 먹여야 했습니다. 이 어린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속사람의 강건입니다. 그러나 기도만으로 되지는 않습니다.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라지만, 정신력만으로 되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벤치프레스로 215파운드를 드는 남편이 있고, 50파운드에도 팔이 떨리는 아내가 있습니다. 아내가 아무리 정신을 집중해도 215파운드는 들리지 않습니다. 근력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언제나 팔다리의 수고와 함께 드려져야 합니다.
'강건'이라는 말을 꺼내면 사람들은 불편해합니다. 요즘 예배당에서 유행하는 힘 이야기와 닮았을까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힘은 전혀 다릅니다. 한때 어느 그룹 회장 장로가 불법 외화 유출과 불법 자금 관리로 구속된 일이 있었습니다. 교회당을 지어 기증하고, 선교와 구제에 힘쓰고, 많은 목사에게 장학금을 대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자 한국과 미국 이민 교회의 이름난 목사들이 일간지에 옹호 글을 싣고 연판장을 돌리며 구명운동에 나섰습니다. 그 장면을 본 세상은 이렇게 읽었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을 받아 저렇게 힘 있고 빽 있는 사람이 되는구나." 그가 그룹 회장이 아니었어도 누가 구명운동을 했을까요?
해마다 북미의 유학생 수련회에서는 "고지를 점령하라"는 외침이 울려 퍼집니다. 수천 명의 젊은이가 눈물을 흘리며 주먹을 쥡니다. 돈도 벌고 높은 자리에도 올라, 그 자리에서 겸손하게 살면 세상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어떤 강사는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은 근본이 못나서 겸손의 미덕도 행할 수 없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속사람의 강건이 아니라 겉사람의 강건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일을 하시려고 백성을 동원하는 종교가 아니라,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사건을 일으키시는 종교입니다. 일보다 백성이 백성다워지는 것이 먼저입니다.
역사도 같은 것을 증언합니다. 박해받던 초대 교회와 공산 치하, 독재 아래서 교회는 신앙의 순수성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힘과 땅과 재물이 주어지자 교회는 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왕을 세우고 폐할 힘을 가졌던 교회가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던 무한한 것에서 끊어졌고, 스스로를 지키려고 두 가지 우상을 좇습니다. 힘과 지혜입니다. 유대인은 힘 있는 정치적 메시야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메시야가 로마 관리의 손에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그것은 율법이 말하는 "나무에 달린 자의 저주"였습니다. 헬라인에게 신의 제1속성은 '아파테이아', 곧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고통 속에 죽었다니, 그들에게는 어리석음 그 자체였습니다. 세상이 원하는 메시야는 돌로 떡을 만들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고 부귀영화를 선물하는 메시야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바로 그 십자가가 진짜 힘이요 진짜 지혜라고 말입니다(고전 1:18~31). 바울 자신도 그랬습니다. 말은 시원치 않았고 몸은 약했으며, 자기가 개척한 교회에서 쫓겨나고 홀대받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발자취를 따라 일이 이루어지면, 사람들은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라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리석은 십자가에 함께 달려 죽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힘과 지혜로 살겠다던 옛 사람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롬 6:6). 그런데 몸은 예배당에 앉아 있으면서 세상과 똑같은 힘과 지혜를 좇고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안 죽은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새 신자로 국회의원이나 장군이 들어오면 온 교회가 술렁이고,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은 무시당합니다.
힘과 지혜를 좇은 인간의 세상은 정말 행복해졌을까요? 소수에게는 편안한 세상이 되었으나 대다수에게는 여전히 힘겨운 세상입니다.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굶어 죽는데, 한쪽에서는 곡가를 지키려고 밀을 바다에 버립니다. 내 이익과 내 힘을 조금 내려놓고 나누면 많은 이들이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나를 죽여 남을 이롭게 하는 것, 공산주의는 이 원리를 흉내 냈으나 실패했습니다. 죄인은 남을 위해 사심 없이 일할 만큼 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혁명에 성공한 사람들은 곧 자기가 상위 계급이 되었습니다.
내 것을 풀어 남을 살찌우고, 주고 또 주다가 목숨까지 내어주는 삶이야말로 인류의 어떤 지혜도 무색하게 하는 진짜 지혜입니다. 세상을 뒤집어 놓는 힘이 거기서 나옵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속사람이 강건하지 않으면 꿈도 꿀 수 없습니다. 피 같은 돈을 남을 위해 쓰는 일이 어찌 쉽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이 기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에게도 한 가지를 당부하게 됩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 남보다 뛰어나게 해 달라고, 요행히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경쟁에서 무조건 이기게 해 달라고, 교회는 빠져도 학교에서는 일등을 하게 해 달라고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이의 복을 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확장인 아이에게 자기 욕심을 채워 달라고 요구하는 일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은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긍휼히 여겨 나누고 화평을 만드는 사람입니다(마 5:3~9). 모두 십자가의 원리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힘들기에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아를 죽였을 때, 하나님이 책망하신 것도 이 문제였습니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면 내가 네게 무엇이든지 더 주었을 것이다."(삼하 12:8)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야 할 백성이 자기 힘을 믿고 그 힘을 오용했다는 책망이었습니다. 오늘의 교회들이 재산과 세력 때문에 갈라지는 것도 같은 뿌리에서 나옵니다.
월드컵 경기를 보던 어느 날, 한 남자가 우리 선수의 헛발질에 저도 모르게 소리쳤습니다. "저걸 다리라고 달고 다니냐?" 곁에 있던 아내가 나중에 그 말을 전해 주었다. 자기가 들어가면 5분도 못 뛸 사람이 남을 경기장에 내보내 놓고 욕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연고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작 싸워야 할 학생들은 관중석에서 소리만 지르고, 사 온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싸웁니다. 그러고는 이기면 자기가 이긴 줄 압니다.
교회에도 그런 신앙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누가 어린애 취급을 하면 화를 내면서, 교회에만 들어오면 "목사님, 젖 주세요" 하는 어린아이가 됩니다. 감기에 걸리면 의사를 찾아가야 하는데 목사에게 달려와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밥 먹을 때마다 목사에게 기도를 시킵니다. 속사람의 강건으로 자기가 싸워야 할 싸움을 목사가 대신 싸워 주기를 바랍니다. 목사에게 자기를 투영해 놓고, 목사가 잘하면 자기가 잘하는 줄 알고, 못하면 죽일 놈 살릴 놈 합니다. 그것이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 신앙입니다.
감옥에서 바울은 "하나님, 제가 가서 대신 싸우겠습니다"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에베소 교인들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 주셔서 그들이 싸우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관중석에서 내려오십시오. 십자가의 도로, 십자가의 원리로 이 세상을 살아낼 실력을 구하십시오. 그것을 위해 매달려 기도하고 연습하고 훈련하십시오. 사르키코스에 머물지 말고 프뉴마티코스로 자라가십시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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