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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에베소서

에베소서(43) - 어디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0. 24.

에베소서 3장 14-19절.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주일 낮 예배가 끝난 교회 마당에서 초등학교 5학년 하준이가 할머니의 손을 잡고 물었습니다. "
할머니, 천국 가면 뭐가 제일 좋아요?" 할머니는 잠시 생각하다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니까 제일 좋지." 하준이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하준이가 아는 천국은 황금 길과 보석 집, 맛있는 음식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좋은 곳에 덤으로 계시는 분쯤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거꾸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 짧은 대화에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드린 기도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상한 기도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이미 예수를 믿는 성도였고, 그리스도는 이미 그들 안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왜 "
계시게 해 달라"고 했을까요? 하숙집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습니다. 어떤 학생이 하숙방에 이사 온 지 몇 달이 지났습니다. 같은 집에 주인이 살고 있는데도 얼굴 한 번 마주친 적이 없고 이름도 모릅니다. 한 지붕 아래 있어도 서로 알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가 그렇게 삽니다. 예수님이 자기 안에 계신다고 고백하면서도 그분이 어떤 분인지 몰라서 만나고 싶은 마음조차 없습니다.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을 알고 싶어지려면 먼저 천국이 무엇인지부터 바로 알아야 합니다. 천국은 영토나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으며 그분과 함께 사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래서 눈물과 고난이 있는 이 땅에서도 천국을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천국을 공간으로만 이해하면 사람들이 쉽게 속습니다. 과거에 한 이단 단체가 땅속 깊이 파고 들어가 지옥을 발견했다며 뿔 달린 사자들의 사진을 잡지에 실은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조작으로 드러났지만 겁먹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천국을 다녀왔다는 체험담 책들은 반대쪽으로 사람들을 흔들었습니다. 천국을 아름다운 휴양지처럼만 그려서, 읽는 사람의 마음에 "
좋은 곳인데 하나님도 계시더라"는 생각만 남긴 것입니다. 그렇게 상상한 천국에는 예배하고 찬양해야 하는 시간이 오히려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자기가 그린 천국이 도리어 지옥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있느냐입니다. 비가 새는 판잣집이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괜찮다는 옛 노래가 있습니다. 한 남편은 아내가 미안해서 "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라"고 하면 아내가 늘 이렇게 대답한다고 했습니다. "당신이 안 가면 파라다이스에 가도 재미없어요." 세상 사람들도 아는 이치입니다. 천국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분과 영원히 함께 있는 곳입니다. 그곳이 좋아서 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계셔서 가고 싶은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는 천국의 예행연습과 같습니다. 천국에서 해야 할 가장 큰 일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라면 새벽부터 줄을 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만나는 자리는 힘들어도 기쁩니다. 반대로 사소한 일만 생겨도 예배를 빼먹는 사람은 천국을 아직 맛보지 못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 영원히 할 일이 지루하게 느껴질 테니 말입니다.

성경은 그 천국으로 가는 길을 한 문장으로 알려 줍니다. "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은 단지 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영원하다'는 말은 더 부족한 것도, 더 손댈 것도 없는 완전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영생은 한 번에 주어진 선물이면서 동시에 평생 걸어가야 할 길이기도 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하루아침에 어른이 되지 않듯, 십자가로 새로 태어난 성도도 자라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 끝 날까지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 것도 이 성장을 끝까지 이끄시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어떤 청년이 좋아하는 가수의 생년월일과 고향, 앨범 목록까지 줄줄 외운다고 해 보십시오. 그는 그 가수에 대해 많이 알지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릅니다. 정보를 아는 것과 그 사람을 아는 것은 다릅니다. 주님은 성도들을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니라, 그분을 인격으로 '아는' 사람으로 만들려 하십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 간증은 대부분 "
저는 이때 이렇게 구원받았습니다"에서 끝납니다. 결혼식 날 이야기만 하고 그 뒤에 부부로 함께 산 이야기는 하나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이 광야를 걸어야 했듯, 구원받은 이후에 날마다 주님을 알아 가는 이야기가 이어져야 합니다. 구원은 이미 받았으나 완성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에 신앙생활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좋은 본보기입니다. 그는 본래 우상을 만들어 팔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를 불러내셨고, 그는 인생길을 걸으며 하나님을 조금씩 알아 갔습니다. 애굽에서는 바로를 꼼짝 못 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조카 롯이 잡혀갔을 때는 일개 부족장이던 그가 318명을 데리고 다섯 나라의 연합군과 싸우러 나섰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신뢰하게 된 것입니다. 그 신뢰는 모리아 산에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다고 믿고 아들 이삭을 바치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에 기꺼이 순종하는 곳이 천국이라면, 아들을 바치는 그 자리도 아브라함에게는 천국이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행함'도 여기서 달리 보입니다. 그것은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자기 삶을 통째로 던지는 일입니다. 수영을 배우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수영 책을 백 권 읽어도 물에 몸을 맡기지 않으면 뜨지 못합니다. 물이 나를 받쳐 줄 것을 알아야 몸을 맡길 수 있습니다. 기생 라합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하신 일을 소문으로 듣고 마음이 녹아, 목숨을 걸고 정탐꾼을 숨겨 주었습니다. 십자가 곁에서 죽어 가던 강도는 예수님의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그분을 알아 갔고, 마지막 순간에 "
나를 기억하소서" 하며 자기 목숨을 맡겼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은 알면서 아무것도 맡기지 않는 믿음은 귀신들의 믿음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알아 가야 할 예수는 어떤 분일까요? 먼저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이 되기로 하셨습니다. 비유하자면 한 나라의 왕이 거지들의 마을로 내려가 그들과 똑같은 거지가 되어 사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이 낮아지심이 그보다 훨씬 크다고 말합니다. 열방도 하나님 앞에서는 통 속의 물 한 방울 같고, 하나님은 천지를 살피실 때에도 스스로 몸을 낮추셔야 하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분이 비우신 것은 신성이 아니라, 능력으로 자신이 하나님임을 증명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배고프고 피곤하고 슬프고 아픈 것을 사람처럼 그대로 겪으셨습니다.

왜 하필 사람이어야 했을까요? 올림픽 대표 선수를 생각해 보십시오. 대표가 금메달을 따면 나라 전체가 금메달을 얻은 것처럼 기뻐합니다. 성경은 이를 '대표의 원리'라고 합니다. 아담이 인류를 대표해 무너졌기 때문에, 둘째 아담이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해 오셔야 했습니다. 죄인과 하나님 사이를 화해시킬 수 있는 중보자는 죄 없는 사람이신 그분뿐입니다.

그런데 누군가를 대신해 형벌을 받으려면 둘 사이가 보통 관계여서는 안 됩니다. 어린 자식이 크게 아플 때 부모는 "
차라리 내가 대신 아프면 좋겠다"고 합니다. 한 몸처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대신 죽을 사람들을 먼저 신부로 맞이하셨습니다. 남이 아니라 한 몸이 되신 뒤에 죽으셨기에, 그분의 죽음이 곧 신부의 죽음이 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뒤에는 성령을 보내 그들을 한 영으로 단단히 묶으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그리스도의 성품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성품으로 사는 삶에는 놀라운 평안이 따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 나라가 움직이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두려워합니다.
"말씀대로 살면 손해를 볼 텐데." "세상이 바보라고 부를 텐데." 자전거를 처음 배우는 아이의 보조바퀴와 같습니다. 떼면 넘어질까 겁이 나지만, 떼어야 진짜 자유로 달릴 수 있습니다. 사탄은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믿게 하는 보조바퀴를 가득 달아 놓았습니다. 그것이 밀려나는 길은 예수님을 아는 만큼 그분이 마음에 차지하는 자리가 넓어지는 것입니다.

옛날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메시아를 기다리다가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고백했습니다. "
주여, 이제는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예수를 아는 사람은 죽음 앞에서도 이렇게 당당합니다. 이 땅의 몸은 여전히 곤고하여 신음하지만, 그만큼 새 몸을 입고 주님과 영원히 사는 날을 더 간절히 기다리게 됩니다.

사탄은 이 길에서 사람들의 눈을 돌리려고 갖가지 영광을 내밉니다. 광야에서 예수님께도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짜 영광이었고, 예수님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진짜 영광을 아셨기에 거절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편안함과 평안함을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편안함은 세상이 주는 것이고, 평안함은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성경을 펴고 날마다 그 예수를 묵상하는 수고가 따라야 합니다.

교회 마당에서 하준이는 할머니의 대답을 한참 곱씹었습니다. 몇 해가 지나 하준이가 어른이 되어 이 말을 이해하게 된다면, 그때 천국은 '어디'가 아니라 '누구'의 이름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간절히 구한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