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도서 9장 13~18절
13 내가 또 해 아래서 지혜를 보고 크게 여긴 것이 이러하니
14 곧 어떤 작고 인구가 많지 않은 성읍에 큰 임금이 와서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15 그 성읍 가운데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라 그러나 이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16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낫다마는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 말이 신청되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17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들의 말들이 우매한 자들의 다스리는 호령보다 나으니라
18 지혜가 무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하느니라
어느 작은 성읍이 있었습니다. 성벽은 낮았고 성문을 지키는 병사의 수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힘센 왕의 군대가 그 성을 에워쌌습니다. 왕은 성벽 바깥에 토성을 쌓아 올리며 함락을 준비했습니다. 성 안 사람들은 절망했습니다. 군사력으로는 도무지 맞설 수 없는 상대였습니다.
그런데 그 성 안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재산도, 명예도, 지위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지혜로 무언가를 해냈고, 결국 그 성은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전도서 9장은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성읍 가운데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라 그러나 이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전 9:15)
이야기는 여기서 이상한 방향으로 꺾입니다. 성은 구원받았습니다. 그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인 어린아이도, 노인도, 가축까지도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일을 해낸 사람의 이름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전도자는 이 장면을 보고 "크게 여겼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감탄이 아니라 충격에 가까운 반응이었습니다. 사람을 살린 지혜가, 그 사람이 가난하다는 이유 하나로 통째로 잊혀지는 세상을 전도자는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와 매우 닮은 또 하나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무엘하 20장, 다윗의 시대였습니다. 세바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키고 아벨이라는 성읍으로 숨어들었습니다. 다윗의 군대 사령관 요압이 군대를 이끌고 그 성을 완전히 포위했습니다. 성벽을 무너뜨릴 토둔까지 쌓아 올린 그 순간, 성 안에서 한 여인이 성벽 위로 올라와 소리쳤습니다. "당신이 요압입니까? 내 말을 들으십시오." 그 여인은 요압에게 물었습니다. 왜 이스라엘의 어머니와 같은 성읍을 멸망시키려 하느냐고 말입니다. 요압은 자신의 목적이 성읍 전체의 파괴가 아니라 반역자 세바 한 사람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성읍 사람들을 설득했고, 세바의 머리를 베어 성벽 너머로 던졌습니다. 요압의 군대는 나팔을 불며 물러갔고, 성읍은 하나도 상하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한 여인의 지혜로 성읍 전체가 구원받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의 결말에는 이런 문장이 없습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무엇이었다." 성경은 그녀에 대해 단 한 마디도 더 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누구의 딸이었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 기록도 없습니다. 성 하나를 구했지만, 그녀는 역사에서 완전히 지워졌습니다.
전도서의 가난한 지혜자와 사무엘하의 이름 없는 여인, 두 사람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힘이 없는 자였고, 둘 다 사람을 살렸으며, 둘 다 잊혀졌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성을 무너뜨리려 했던 왕이나 요압의 이름은 기억합니다. 그러나 정작 사람을 구원한 이들의 이름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전도자는 그 이유를 담담하게 짚어냅니다. "지혜가 힘보다 낫다마는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 말이 신청되지 아니한다"(전 9:16) 세상의 셈법은 단순합니다. 목소리가 크고 힘이 센 사람의 말이 옳은 말이 됩니다. 조용히 진실을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묻혀버립니다. 전도자는 이 원리를 아주 생활 속의 장면으로 설명합니다.
교통사고가 나면, 현장에서 먼저 큰소리를 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블랙박스를 가진 사람은 침묵합니다. 그는 다급하게 소리칠 필요가 없습니다. 진실은 이미 그의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누구의 잘못인지 밝혀집니다. 지혜로운 자의 조용함은 이와 같습니다. 당장은 억울하고 무시당하는 것처럼 보여도, 진실은 결국 스스로 자신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여기서 세상에 대한 냉소로 끝내지 않습니다. 그는 한 가지 더 무서운 사실을 덧붙입니다. "지혜가 무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하느니라"(전 9:18) 지혜가 아무리 훌륭한 것을 세워도, 힘 있는 죄인 한 사람이 그것을 순식간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지혜자가 애써 지켜낸 성읍도, 힘을 가진 자의 손에 다시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타락한 세상의 실제 모습입니다. 선한 것을 세우는 데는 오랜 지혜와 인내가 필요하지만, 그것을 무너뜨리는 데는 죄인 한 사람의 오만함이면 충분합니다.
전도서의 결론이 여기서 멈췄다면, 이 본문은 그저 인간사의 씁쓸한 진리를 확인하는 것에 그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를 펼쳐보면, 이 "가난한 자의 지혜"라는 주제가 훨씬 더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씁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여기 세상에서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가난한 지혜자"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이신 분이 스스로 자신을 비워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세상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낮아지셨습니다. 왕궁이 아니라 말구유에서 태어나셨고, 목수의 아들로 자라셨으며, 십자가라는 가장 수치스러운 형벌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그분이 가지고 오신 지혜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성을 구한 이름 없는 가난뱅이의 지혜보다 더 하찮아 보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 역설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고전 1:18, 20) 세상은 표적을 구하고 지혜를 찾습니다. 화려한 증거와 논리적인 설득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 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었고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음이었습니다. 힘도 없고, 군대도 없고, 정치적 권력도 없이, 그저 조용히 죽으신 한 사람, 전도서의 가난한 지혜자가 사람들에게 잊혀졌듯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도 세상의 눈에는 실패한 자, 버림받은 자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지혜를 알아보는 사람이 애초에 정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눅 10:21) 이 말씀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숨기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신다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전도서가 보여준 원리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힘 있는 것, 화려한 것, 증명된 것만을 지혜로 인정합니다. 그들은 가난한 자의 지혜를 볼 눈이 없습니다. 반면 자기 힘을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 어린아이처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이 숨겨진 지혜가 열립니다. 바울은 이것을 자신의 언어로 다시 풀어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전 3:18)
세상의 지혜로 무장한 사람은 자기 눈을 가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화려한 것만 보고 그 뒤에 숨은 진짜 지혜를 놓칩니다. 반면 자기의 지혜를 내려놓은 사람,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 아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을 구했지만 잊혀진 가난한 자의 이야기가 결국 가리키고 있던 방향입니다.
전도서를 쓴 사람은 마지막에 이렇게 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왜 지혜를 구해야 하는가? 결국 잊혀질 것인데." 그러나 성경 전체가 가리키는 답은 분명합니다. 세상에서 잊혀진 지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낮아짐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크게 쓰신 방식이었다는 것입니다. 성을 구한 가난한 지혜자는 이름 없이 사라졌습니다. 아벨 성을 구한 여인도 역사 속에서 지워졌습니다. 그러나 그들보다 훨씬 크게, 완전하게 자기를 낮추신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계산으로는 실패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낮아짐이야말로 온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능력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은 여전히 목소리 크고 힘센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조용히 옳은 말을 하는 사람, 자기를 낮추고 섬기는 사람의 수고는 여전히 쉽게 잊혀집니다. 그러나 그 낮아짐의 자리,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조용한 순간이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보시는 자리입니다. 세상이 잊은 지혜를,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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