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도서 9장 11~12절
11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12 분명히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
바다 밑을 헤엄치는 물고기 한 마리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물살은 평온했고, 먹이는 충분했고, 앞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습니다. 그 물고기는 자신이 그물을 향해 헤엄쳐 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람을 가르며 자유롭게 날던 그 순간, 새는 자기 발이 곧 올무에 걸릴 것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준비도, 예고도, 경고음도 없었습니다. 그저 어느 순간 그물이 조여들고, 올무가 다리를 붙잡았을 뿐입니다.
전도자는 이 장면을 인생의 거울로 세워 놓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전 9:12). 우리는 스스로를 물고기나 새보다 훨씬 지혜롭고 준비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도자의 눈에는, 재앙 앞에서만큼은 우리도 그 물고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몇 해 전, 한 방송사에서 어린 영재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수학 문제를 어른보다 빨리 푸는 아이, 낯선 외국어를 며칠 만에 익히는 아이, 그리고 유독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초등학생의 나이에 오케스트라 곡을 작곡하고, 직접 지휘봉까지 잡던 아이였습니다. 부모라면 누구나 그런 아이를 보며 부러움과 소망을 함께 품었을 것입니다. "우리 아이도 저렇게만 자라준다면."
그런데 우리는 또 다른 이름 하나를 기억합니다. 어린 나이에 대학에 입학해 세상을 놀라게 했던 한 천재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나이에 이미 대학 강의실에 앉아 있던 그 아이는, 수년이 지나도록 박사 학위를 받지 못해 결국 학교로부터 제적 통보를 받았다는 소식이 뉴스에 오르내렸습니다. 남들보다 앞서 출발했다고 해서, 인생의 모든 트랙에서 늘 앞서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도자는 바로 이 진리를 11절에서 선언합니다.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어느 육상 경기에서, 선두를 달리던 선수가 한 바퀴를 남겨두고도 마지막 바퀴인 줄 착각해 결승선으로 뛰어 들어간 일이 있었습니다. 뒤늦게 실수를 깨닫고 다시 트랙으로 돌아갔지만, 이미 순위는 4등으로 밀려나 있었습니다. 아무리 빠른 다리를 가졌어도, 예상치 못한 실수 하나가 결과를 뒤바꾸어 버립니다.
용맹한 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칼과 창 앞에서는 강할지 몰라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세균 하나에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전도자가 말하는 "시기와 기회"란 곧 '때'와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때와 사건은, 아무리 빠르고 강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아무 준비도 하지 말아야 합니까?" 이런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로부터 유비무환이라는 말을 붙들고 살아왔습니다. 미리 대비하면 근심할 일이 없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 위에서 태어난 대표적인 산업이 바로 보험입니다. 생명보험, 화재보험, 지진보험, 실손보험까지, 우리는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거의 모든 불행에 대비하는 상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 준비가 재난을 완전히 막아 줍니까? 지진이 잦은 나라로 알려진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철저한 내진 설계로 원자력 발전소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2011년, 강력한 지진과 이어진 쓰나미가 후쿠시마 원전을 덮쳤고, 방사능 유출 사고는 지금까지도 완전히 수습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세울 수 있는 가장 정교한 방벽조차, 어느 날 갑자기 닥친 재앙 앞에서는 무력했습니다.
이 불안한 세상 속에서 종교마저도 하나의 시장이 되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이만큼 준비하고 헌신하면 재앙을 피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지옥에 가지 않고 영생을 보장받는다" 이런 약속을 파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이미 신앙의 자리가 아니라 종교라는 이름의 시장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서 9장 11절 한 구절만 마음 깊이 새겨도, 우리는 그런 거짓 약속에 쉽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능력 있는 사람이라도 불행과 재난은 예외 없이 찾아옵니다. 물론 자원이 많은 사람은 자원이 없는 사람보다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뇌출혈이나 심장마비는 재산의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온갖 기계 장치에 몸을 의탁한 채,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뎌야 하는 경우마저 있습니다.
12절은 이 진리를 다시 한번 되짚습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재앙이 닥칠 그 순간을 결코 미리 알 수 없습니다. 물고기가 그물에 걸리고 새가 덫에 걸리듯, 인생도 예고 없이 찾아오는 재앙의 날 앞에서 꼼짝없이 붙잡히고 맙니다.
이 말씀 앞에서 마음이 편안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사고로 아내와 딸을 한꺼번에 잃고 홀로 남겨진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며 절규했습니다. "우리가 무슨 개나 돼지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그의 외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상 곳곳에서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설교의 제목은 '어느 날 갑자기'입니다. 물고기나 새는 자신이 그물이나 덫에 걸릴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평범한 하루를 보내다가 순식간에 붙잡힙니다. 사람도 다르지 않습니다. 누구도 재앙의 날을 원하지 않기에, 저마다 그것을 피하려고 애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재앙이 홀연히, 미처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갑작스럽게 임하면, 우리는 결국 거기에 걸려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씀 앞에서 인생은 물고기나 새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는 존재로 드러납니다.
이 사실을 들을 때, 우리 마음에는 두 가지 반응 중 하나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거나, 혹은 오히려 어깨의 짐을 내려놓은 듯한 홀가분함을 느끼거나 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바로 그 분노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질문을 던진 사람이었습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합 1:13~14).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강대국을 하나님이 뻔히 아시면서도 왜 방관하시는지, 하박국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족해도 저 이방인들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우리를 마음대로 짓밟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강대국이 이스라엘을 삼키는 모습을, 하박국은 그물로 물고기를 낚아 올리는 어부의 모습에 빗댑니다. 더 나아가 그 어부는 자신의 그물에 제사를 드리고 분향까지 하면서, 그 그물의 힘으로 열방을 삼켜 나갑니다. 하나님은 정말 이 모든 것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계시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 하나님은 심판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다만 그 심판이 더디게 느껴질지라도 믿음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토록 힘겹게 느껴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지나치게 대단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바다에서는 매일 수백만 마리의 물고기가 그물에 걸려 올라옵니다. 그러나 그 물고기들이 무리를 지어 어부에게 항의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동료 새 한 마리가 덫에 걸렸다고 해서, 남은 새들이 떼를 지어 덫을 놓은 사람을 공격하러 몰려온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우리가 무슨 물고기나 새냐"며 반발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오히려 정반대의 진실을 선언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 사람의 마음은 모든 피조물보다 더 깊이 부패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물고기가 그물에 걸리고 새가 덫에 걸리듯, 우리 인생에도 온갖 재앙이 찾아오게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얼마나 미약하고 하찮은 존재인지를 뼈저리게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여호와 앞에서는 모든 열방이 없는 것 같고 빈 것 같으며(사 40:17), 지구와 우주를 다 합쳐도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통의 한 방울 물, 저울의 작은 티끌에 지나지 않습니다(사 40:15). 사람의 호흡은 그 콧구멍에 있을 뿐이니 무엇을 셈에 넣을 가치조차 없고(사 2:22), 우리의 생애는 그림자와 같고(시 39:4),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약 4:14).
그림자와 안개 같은 존재가 아무리 거창하게 대비책을 세운다 해도, 결국은 흙으로, 티끌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렇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어느 날 갑자기 임하여 우리 자신이 이 그림자와 안개 같은 존재임을 진정으로 깨닫게 될 때, 인생의 짐은 오히려 가벼워집니다. 그 은혜는 단지 "나는 별것 아니다"라는 겸손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아온 모든 것이 죄였음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은혜입니다.
이사야 40장 26~27절은 이 진리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우리는, 오히려 자신이 억울하다고 항변합니다. "하나님이 내 사정을 살펴 주지 않으신다"고 불평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자를 성경은 '야곱'이라 부릅니다. 야곱은 곧 이스라엘이며, 오늘 우리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하나하나 만드시고, 그 모든 것을 이끌어 내시고, 심지어 그 이름까지 낱낱이 부르시는 분이신데, 어찌 무엇 하나 빠뜨리시겠느냐고 하십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일하심을 다 헤아리지 못해 불평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든, 결국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재단하여 선악을 판단하려 드는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예수님은 참새 한 마리조차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원망을 앞세웁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우리가 어느 날 환난을 통과하면서, 자기 자신이 참으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 아무 원인도 없이, 순전히 하나님 편에서 갑작스럽게 부어진 은혜입니다.
이사야 47장은 또 다른 각도에서 같은 진리를 보여줍니다. 바벨론은 스스로를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영영히 여주인이 되리라 …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자신은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오만한 확신이었습니다. 바벨론은 본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해 사용하신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그 힘을 얻은 바벨론은 오히려 교만해져 이스라엘을 짓밟았습니다.
이사야는 이 바벨론을 처녀 딸에 빗대며 준엄하게 경고합니다.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사 47:11). 바벨론을 한 개인으로 보아도, 한 국가로 보아도, 심지어 전 인류로 보아도 이 말씀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스스로 결코 망하지 않으리라 확신하며 온갖 대비책을 세우지만, 파멸이 홀연히 임하는 순간 그 어떤 대비책도 무력해집니다. 우리 역시 바벨론처럼 살아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무너짐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택함 받은 자는 비로소 눈을 뜨게 됩니다. 자신이 우상을 숭배해 온 자였음을 깨닫고, 회개하며 예수님을 믿는 일이 홀연히 일어나는 것입니다.
말라기 3장은 이 진리를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으로 이어 갑니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예수님은 이 언약의 사자를 세례 요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1:10). 세례 요한이 전한 메시지는 단순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리고 그 회개와 천국을 맞이하는 길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리스도를 오랫동안 기다리며 나름대로 준비해 왔다고 자부하던 이들은 정작 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리와 죄인들과 창기들, 그리고 이방인들이 이 복음을 듣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세워 놓은 인과율이나 준비의 순서를 따라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로운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은, 주님이 언제 어디서 홀연히 다시 오시더라도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으로 그분을 맞이할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렇게 편지합니다.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2~3). 그러나 이어서 바울은 위로의 말을 덧붙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물고기는 그물이 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새는 덫이 놓인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빛의 아들, 낮의 아들이 된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에게도 재앙의 날은 여전히 홀연히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이 우리를 완전히 삼켜버리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날을 예비하신 분, 우리 자신이 물고기나 새와 다를 것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시고 그 자리에서 은혜로 붙잡아 주신 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처음의 그 물고기와 새에게로 돌아가 봅시다. 그들은 그물과 올무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인생의 어느 순간, 예고 없이 찾아오는 재앙의 그물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우리에게 절망으로만 끝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홀연한 재앙의 자리는,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홀연히 임하는 자리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그림자와 안개 같은 존재인지를 인정하는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자기 자신을 붙들던 손을 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붙잡게 됩니다. 그러니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그 순간을 두려움 속에서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붙드신 은혜의 손을 붙잡은 채, 깨어 정신을 차리고 그 날을 맞이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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