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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출애굽기

출애굽기 - 영원한 규례, 처음 난 것이 알려주는 구원 이야기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9. 14.

출애굽기 13장 1~10절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애굽 곧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온 그 날을 기념하여 유교병을 먹지 말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너희를 그 곳에서 인도해 내셨음이니라
4   아빕월 이 날에 너희가 나왔으니
5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땅 곧 네게 주시려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시거든 너는 이 달에 이 예식을 지켜
6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고 일곱째 날에는 여호와께 절기를 지키라
7   이레 동안에는 무교병을 먹고 유교병을 네게 보이지 아니하게 하며 네 땅에서 누룩을 네게 보이지 아니하게 하라
8   너는 그 날에 네 아들에게 보여 이르기를 이 예식은 내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로 말미암음이라 하고
9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이 네 입에 있게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강하신 손으로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
10   해마다 절기가 되면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출애굽기 13장을 처음 읽으면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바로 앞 장에서 이미 유월절과 무교절 규례를 자세히 말씀하셨는데, 13장에서 또 반복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아이에게 같은 말을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일러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반복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12장이 "
무엇을 하라"는 규례였다면, 13장은 "그것이 무슨 뜻인가"를 풀어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면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이르시되"라고 하는데, 여기 쓰인 두 단어 '다바르'와 '아마르'는 둘 다 "말씀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명령만 내리시는 분이 아니라, 그 명령의 의미를 친절하게 선포해 알려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훌륭한 선생님이 숙제만 내주고 끝내지 않고, "이 숙제가 왜 너에게 필요한지" 설명해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2절). 여기서 "처음 난 것"이라는 말을 우리는 흔히 "첫 번째로 태어난 아이 한 명"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처음 난 것은 그보다 훨씬 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치 한 알의 씨앗 속에 앞으로 맺힐 모든 열매의 정보가 담겨 있는 것처럼, 처음 난 것은 그 뒤에 태어날 모든 것을 대표하는 존재입니다. 농부가 첫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 때, 그것은 단지 이삭 하나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 밭 전체의 소출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행위였습니다. 처음 난 것 안에 그 다음에 날 모든 것이 이미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결국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선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사람의 처음 난 것이야 그렇다 쳐도, 왜 짐승의 처음 난 것까지 하나님께 돌리라 하시는 것일까요? 짐승이 유월절을 알 수 있습니까?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에서 "
짐승"은 단순한 동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아직 유월절 어린 양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존재를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마치 아직 말을 배우지 못한 갓난아기가 부모의 사랑을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그 사랑의 의미를 언어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짐승과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하고, 그저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상태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짐승 같은 존재가 사람(처음 난 자)을 통해서 유월절을 알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마치 한 가정에서 먼저 믿음을 갖게 된 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통해서 아직 믿지 않는 가족들, 아직 복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식구들이 서서히 그 은혜의 자리로 이끌려 오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 난 분, 곧 장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다음의 것들, 즉 아직 아무것도 모르던 자들까지 구원을 얻게 된다는 약속이 이 규례 속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20절). 그리스도가 첫 열매이시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
나 혼자 잘 믿어서 얻는 개인 구원"도 아니고, "여러 사람이 모여서 얻는 단체 구원"도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구원"입니다.

쉽게 비유하자면, 손가락 하나가 따로 떨어져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살아있는 손가락이 될 수 없습니다. 손가락이 살아있는 이유는 몸에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내가 무언가를 열심히 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몸에 붙어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가 구원을 받아야 한다", "확신을 가지고 믿음을 키워야 한다"는 식의 자기중심적 가르침은 성경의 본뜻과 거리가 있습니다. 건물로서의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애굽 곧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온 그 날을 기념하여 유교병을 먹지 말라"(3절). "유교병"은 누룩이 들어간 빵입니다. 누룩이 들어간 빵은 종살이하던 시절, 즉 율법의 종으로 있을 때 먹던 빵을 상징합니다. 애굽이라는 거짓 성전 안에서는 사람의 계명과 교훈이 뒤섞인 다른 복음으로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비유하자면, 순수한 생수 한 병이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물에 아주 조금이라도 불순물을 섞으면, 그것은 더 이상 순수한 생수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양의 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인간의 행위나 계명이나 교훈을 조금이라도 섞으면 그것은 더 이상 순전한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마 16:6)고 하셨습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5장에서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7절)고 말합니다. 할례, 안식일, 십일조, 절기 준수 같은 율법적 행위들이 바로 우리가 내버려야 할 누룩이라는 것입니다.

"아빕월 이 날에 너희가 나왔으니"(4절)라고 하는데, '아빕'은 '녹색, 곡식의 여린 이삭'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부드럽다'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여기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곡식이 아니라 부드럽고 여린 새순 같은 것이 이스라엘의 양식이 되었다는 것은, 딱딱한 율법적 행위가 아니라 부드러운 복음이 이스라엘의 참된 양식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에게는 딱딱한 음식이 아니라 부드러운 젖을 먹여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무거운 율법의 짐이 아니라 부드러운 은혜의 말씀을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5절에는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 아모리 사람, 히위 사람, 여부스 사람이 언급됩니다. 성경 여러 곳을 비교해보면 가나안 족속의 숫자는 둘, 다섯, 여섯, 열, 열둘로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데, 대체로 '가나안 일곱 족속'(신 7:1)으로 일컬어집니다. 이들은 언약 백성과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언약을 대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얻는 통찰은 이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언제나 심판을 전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고 믿게 되었다는 것은, 가나안 일곱 족속처럼 십자가를 대적하던 우리의 옛 죄악된 마음이 이미 심판받아 죽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마치 낡은 옷을 벗어야 새 옷을 입을 수 있는 것처럼, 옛 자아가 죽어야 새 생명을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
내가 아직 살아 있는 상태에서 내 힘으로 예수를 믿었다"는 식의 생각은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납니다.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분이라고 표현합니다(17절). 우리의 믿음도 죽음을 통과해야만 얻게 되는 새 생명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5절)에서 젖은 가축에게서, 꿀은 꽃에서 나옵니다. 실제로 가나안 땅이 지리적으로 그렇게 풍요로운 목초지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문자적 묘사가 아니라 언약적 상징입니다. 가축을 길러 젖과 꿀이 풍성해진다는 것은, 짐승과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던 존재들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로 변화되어가는 은혜를 그려주는 그림입니다. 목자가 정성껏 양떼를 먹이고 돌보면 그 양떼가 새끼를 많이 낳고 젖을 풍성히 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정성껏 말씀으로 먹이심으로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리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쓰인 "
지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아바드'로, 이는 '섬긴다'는 뜻입니다. 유월절이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지켜내는 규례가 아니라, 누군가의 섬김을 통해 완성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 섬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마치 빚진 자가 스스로 빚을 갚을 수 없어 절망하고 있을 때, 누군가 대신 그 빚을 다 갚아주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섬기신" 그 은혜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고 일곱째 날에는 여호와께 절기를 지키라"(6절)는 말씀은 앞서 12장 16절의 반복입니다. '이레', 곧 7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언약적 일하심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갈 언약의 땅이 오직 순전한 진리의 말씀만 용납되는 땅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동시에 훗날 하나님의 자녀들이 말씀을 양식으로 삼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언약의 표징이기도 합니다.

"너는 그 날에 네 아들에게 보여 이르기를 이 예식은 내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로 말미암음이라 하고"(8절). 여기서 "아들에게 보여 이르기를"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출애굽을 경험한 사람은 "나만 구원받았다"는 자기중심적 자리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다음 세대에게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 성경에 "나를 위하여"라고 번역되었지만 정확히는 "나에게"라는 표현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나를 죽음에서 건져내신 사건은, 문자적으로 매번 똑같은 절차를 반복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사건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계속해서 다음 세대에게 설명하고 선포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 가문의 어려웠던 시절과 그 시절을 건너온 은혜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주는 것처럼, 신앙의 세대는 그렇게 이어져갑니다.

12장 14절과 17절에서 이미 "
영원한 규례"라는 표현이 등장했는데, 이는 단순히 "앞으로도 계속 지켜야 할 규칙"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영원한 규례란, 하늘에서 일어난 영원한 일이 역사 속으로 뚫고 들어와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출애굽 사건은 과거 어느 시점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지만, 그 구원은 오늘 우리가 계속 기억하고 설명함으로써 지금도 누려야 하는 현재의 은혜입니다.

마치 오래전에 심장 수술로 생명을 건진 사람이 그날의 흉터를 볼 때마다 "아, 내가 그날 살아났지"라고 매일 새롭게 되새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수술은 과거의 사건이지만, 그 생명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는 현재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는 유월절을 문자적인 행동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는 삶으로 그 규례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율법이 네 입에 있게 하라"(9절)는 말씀도 단순히 "입으로 암송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입은 마음의 가장자리입니다. 컵에 물을 가득 채우면 그 물이 컵의 가장자리를 넘어 흘러나오듯, 마음속에 진리의 말씀이 가득 채워지면 그것이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흘러나오게 됩니다. 손의 기호와 미간의 표도 결국 마음에 새겨진 말씀이 삶의 표면으로 드러나는 것을 상징합니다. 신명기 6장에서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6~7절)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출애굽기 13장 1~10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 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직 유월절을 알지 못하던 짐승 같은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 그 구원에는 인간의 어떤 계명이나 행위도 더할 수 없다는 것, 우리가 믿게 된 것은 옛 자아의 죽음을 전제한다는 것, 그리고 이 은혜는 우리 힘으로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섬겨 이루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이 영원한 은혜를 마음에 새기고, 다음 세대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며,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는 삶으로 그 규례를 살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