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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출애굽기

출애굽기 - 처음 난 것, 하나님이 값 주고 사신 생명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9. 20.

출애굽기 13장 11~22절

11   여호와께서 너와 네 조상에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가나안 사람의 땅에 인도하시고 그 땅을 네게 주시거든
12   너는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과 네게 있는 가축의 태에서 처음 난 것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13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처음 난 모든 자는 대속할지니라
14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이것이 어찌 됨이냐 하거든 너는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곧 종이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실새
15   그 때에 바로가 완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모든 것은 사람의 장자로부터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다 죽이셨으므로 태에서 처음 난 모든 수컷들은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려서 내 아들 중에 모든 처음 난 자를 다 대속하리니
16   이것이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가 되리라 이는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 할지니라
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18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19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20   그들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어느 은행원이 오래된 대출 서류함을 정리하다가 이미 완제된 계좌인데도 서류가 폐기되지 않고 계속 보관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은행의 규정은 이랬습니다. "
다 갚은 빚이라도, 그것이 누구의 소유였는지를 증명하는 서류는 영구 보관한다." 소유권의 역사를 지우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출애굽기 13장 11절부터 22절까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일이 꼭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홍해도 아직 건너지 않았지만, 어린 양의 피로 이미 죽음의 심판을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서 다시 한번, 아주 집요하게 같은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
처음 난 것은 다 내 것이다." 왜 자꾸 반복하실까요? 출애굽이라는 사건의 진짜 핵심이 이스라엘의 '탈출'이 아니라, 처음 난 것에 대한 소유권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1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
여호와께서 너와 네 조상에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가나안 사람의 땅에 인도하시고 그 땅을 네게 주시거든." 여기서 놓치기 쉬운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네 조상에게 맹세하신 대로"라는 표현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도 건너기 전인데, 하나님은 벌써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할 것을 전제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도 "네가 순종을 잘해서"가 아니라 "네 조상에게 맹세하신 대로"라고 하십니다. 마치 부모가 이미 세상을 떠나면서 자녀 이름으로 유산을 등기해 놓은 것과 같습니다. 자녀가 아직 그 유산의 존재조차 모르고, 그것을 받을 만한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도, 유산은 이미 그의 것으로 확정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그들의 순종의 결과가 아니라, 이미 맺어진 언약이 시간 속에서 계속 현재화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12절에서 하나님은 "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고 명하십니다. 여기 "구별하여"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바르'는 원래 "지나가다, 건너가다, 넘겨주다"라는 뜻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앞서 13장 2절에서 같은 개념을 말할 때는 '카다쉬'(거룩하게 하다)라는 다른 단어를 썼다는 점입니다. 이 두 단어를 나란히 놓고 보면 그림이 선명해집니다. 애굽이라는 옛 삶을 '건너가서'(아바르) 그 옛 소유권으로부터 '단절되는 것'이 곧 '거룩'(카도쉬)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끊어진 것을 다시 하나님께 '넘겨드리는 것'이 이 규례의 핵심입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도박 빚에 시달리다가, 한 후원자가 그 빚을 전액 대신 갚아주었다고 해봅시다. 이제 이 사람은 더 이상 사채업자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가 매달 첫 월급을 받으면, 그 돈을 자기 마음대로 쓰지 않고 자신을 구해준 그 후원자에게 먼저 가져다드린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후원자가 가난해서가 아닙니다. "
저는 이제 제 소유가 아니라 당신의 것입니다"라는 고백을 매달 반복하는 것입니다. 처음 난 것을 하나님께 돌린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스스로 "나는 거룩하다"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거룩은 그들 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매번 첫 소산을 드릴 때마다 몸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13절은 조금 뜻밖의 규례를 덧붙입니다. "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처음 난 모든 자는 대속할지니라." 왜 갑자기 나귀가 등장할까요? 레위기의 정결법에서 나귀는 부정한 짐승으로 분류됩니다. 게다가 나귀는 짐을 지는 동물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자기가 선택하지도 않은 채로, 이미 율법이라는 짐과 부정함이라는 신분을 짊어지고 세상에 나오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초상입니다. 갓난아기가 무슨 죄를 지었겠습니까마는, 태어나는 순간 이미 죄의 짐을 지고 태어납니다.

여기서 두 가지 길이 제시됩니다. 어린 양으로 대속하거나, 목이 꺾이거나, 대속물이 없으면 그 나귀는 태어나자마자 죽어야 할 운명입니다. 마치 큰 병에 걸려 태어난 아기가 있는데, 유일한 치료법인 값비싼 약이 있지만 그 약값을 감당할 사람이 없으면 그 생명이 꺼질 수밖에 없는 상황과 같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그 약값을 전액 대신 지불했다면, 그 아기는 살아납니다. 이스라엘의 처음 난 아들들이 살아난 것은, 그들이 특별히 선했기 때문이 아니라 어린 양이 대신 값을 치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어린 양은 결국 베드로전서 1장 18~21절이 말하는 그 어린 양, 흠 없고 점 없는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14절부터 16절은 부모가 자녀에게 이 사건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이것이 어찌 됨이냐 하거든..." 이스라엘의 신앙 교육은 추상적인 교리 암송이 아니라, 몸에 밴 의식과 그것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아이가 "왜 우리 집은 이렇게 해요?"라고 물을 때, 부모는 애굽에서 있었던 죽음의 심판과 대속의 은혜를 다시 이야기해줍니다.

신앙 좋은 할머니를 둔 손주가 나중에 어른이 되어 이렇게 고백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
어릴 때는 할머니가 왜 그렇게 매일 기도하시는지 몰랐어요. 그런데 그 이유를 여쭤봤던 그 순간이, 지금 제 신앙의 뿌리가 됐습니다." 신앙은 이렇게 다음 세대의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을 통해 전수됩니다. 처음 난 것을 구별하는 규례는 단지 종교의식이 아니라, 세대를 건너 은혜의 기억을 이어가는 통로였습니다.

17~18절에서는 뜻밖의 장면이 나옵니다.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 지중해 연안을 따라 블레셋 땅을 지나는 길이 있었습니다. 학자들 추산으로 도보 열흘이면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굳이 그 길을 피하시고 광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이유는 "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광야 길에도 전쟁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피하신 것은 물리적 전쟁 자체가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전쟁이었습니다. 18절의 "
대열을 지어 나올 때"라는 표현의 히브리어 '하무쉼'은 "전투 대형을 갖추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시내 산으로 이끄셔서, 그곳에서 언약의 말씀을 받아 진짜 전쟁,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과 싸우는 영적 전쟁을 준비시키려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직 기초 체력도 훈련되지 않은 신병을 곧바로 최전선에 투입하지 않고, 먼저 훈련소로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훈련소에도 고됨과 시련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련은 병사를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짜 전투를 감당할 수 있게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광야로 돌리신 것도 이와 같습니다. 그들이 아직 애굽을 완전히 떠나지 못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먼저 말씀 앞에 세워 그 마음을 뒤집어 놓으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19절, 모세는 애굽을 떠날 때 요셉의 유골을 챙깁니다. 창세기 50장에서 요셉은 죽기 전 "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돌보시리니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라"고 유언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는 행렬의 맨 앞에, 살아있는 지도자 모세만이 아니라 이미 죽은 요셉의 유골이 함께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이것은 마치 한 가족이 오래전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의 유언장을 손에 쥐고, 그 유언대로 새로운 삶의 자리로 이사를 떠나는 모습과 같습니다. 할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에 없지만, 그의 약속의 말은 지금도 가족을 이끌고 있습니다. 요셉은 죽었지만, 그가 남긴 언약의 말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그 죽음과 부활을 통해 지금도 우리를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히브리서 11장 22절은 이것을 믿음의 사건으로 기록합니다.

마지막으로 20~22절,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 기둥으로 이스라엘 앞서 가십니다. 그들이 진 친 곳의 이름 "
에담"은 히브리어로 "그들과 함께"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전기도 없고 지도도 부실했던 광야 한복판에서, 밤이 되면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워집니다. 길을 잃기 딱 좋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타오르는 불기둥이 밤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면 어떨까요? 사람들은 잠들었어도, 그 불빛이 "나는 여전히 너희와 함께 있다"고 말없이 증언하는 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임재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임재의 표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표징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낮이나 밤이나, 그들이 그것을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실제로 그들 곁에 계셨습니다.

출애굽기 13장 11~22절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 흐름이 있습니다. 처음 난 것은 원래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그 소유권은 오직 어린 양의 피로만 회복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8절은 이것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원할 자격이 없는 존재로 태어났지만, 어린 양 되신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하나님 앞에 첫 열매로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기억하고, 다음 세대에게 전하며, 광야 같은 삶의 여정 가운데서도 여전히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신뢰하며 걸어가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부르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