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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의 일기(20) - 길 위의 의사, 그리고 따라오는 그림자 어떤 소식은 마치 그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몸이 가장 약해진 순간에 찾아옵니다. 바울은 지금 말 위에 있었습니다. 채찍을 세 번 맞은 몸으로 빌립보 성문을 나서는 그의 등 뒤로 형제자매들의 찬송 소리가 조용히 따라왔습니다. 누군가 속삭이듯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위로인지 배웅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그 경계쯤 어딘가에 있는 노래였습니다.'정말 점잖고 사랑스러운 이들이야. 이런 이들을 알게 된 건 특권이지.' 바울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말의 걸음에 몸이 흔들릴 때마다 등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그 생각만큼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누가는 의사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직업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의사란 남들이 외면하고 싶어 하는 것을 정면으로 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상처의 깊이를, 고름의 색깔.. 2026. 2. 18.
디도의 일기(19) - 빌립보의 밤에 상처 입은 몸으로 전하는 말씀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행전 16:25,40,20:24)어떤 지도자는 강단에서 내려올 때 박수를 받습니다. 또 어떤 지도자는 감옥에서 나올 때 비로소 진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채찍에 맞은 등이 아직 아물지도 않은 채, 그는 루디아의 집 거실 벽에 기대어 앉으려다 이내 몸을 앞으로 숙였습니다. 상처가 벽에 닿는 순간 전해지는 통증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첫 마디는 자.. 2026. 2. 18.
가득 채우기보다 비워야 흐른다 어느 해 겨울,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존경해 온 선배를 찾아갔습니다. 그 선배는 한때 업계에서 손꼽히는 기획자였고,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일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마주한 그의 얼굴은 낯설게도 편안했습니다. 바쁘다 못해 늘 초조해 보이던 예전 모습과는 달랐습니다."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묻자, 그는 찻잔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말했습니다. "요즘은 좀 비우고 살아." 그 말이 오래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가 가장 잘나가던 시절, 그의 책상 위에는 빈 공간이 없었습니다. 기획서, 메모지, 참고 도서, 수첩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고, 달력은 빨간 펜으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는 단 하루도 허투루 쓰지 않으려 했습니다. 쉬는 날에도 세미나를 들었고, 휴가 중에도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완벽하게 .. 2026. 2. 18.
민수기 - 두 번째 유월절 "너희나 너희 후손 중에 시체로 말미암아 부정하게 되든지 먼 여행 중에 있다 할지라도 다 여호와 앞에 마땅히 유월절을 지키되 둘째 달 열넷째 날 해 질 때에 그것을 지켜서 어린 양에 무교병과 쓴 나물을 아울러 먹을 것이요"(민수기 9:10~11)사막 한가운데서 기념일을 지킨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요. 텐트 앞에 쪼그려 앉아 모래바람을 막으며, 1년 전 그날을 떠올리는 사람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이 기억하는 것은 눈물과 서두름입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발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쥔 채로 밥을 먹었습니다. 문틀에는 어린 양의 피가 발려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왜 이렇게 급히 먹느냐고 물었고, 어른들은 대답했습니다. "오늘밤 우리는 떠난다." 그리고 실제로 떠났습니다.그 출발로부터 꼭 일 년이 지.. 2026. 2. 18.